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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t 인터뷰기사

물속하늘 2013. 3. 8. 11:52

이후以後와 이전以前 그리고 코라khôra 

 

거울같이, 우물처럼 그대에게 

 


 

기 것을 비추지는 못하지만 다른 것을 비추는 것, 곧 거울은 해석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자기 것의 해석이 아니고 다른 것의 기호를 조명해준다. 그러므로 거울은 타자이다. 주체는 객체에게 하나의 거울이며 객체 역시 주체에게 거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거울이다. 세계는 사물 서로서로를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이러한 거울의 사유는 세계의 일의적 해석을 경계한다. 거울에 비친 것은 세계의 흔적에 불과하다. 세계는 흔적의 흔적인 것이다.  

울이 세계의 흔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태고적부터 우물은 인간과 가장 친근하게 세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호수나 강이 음흉하게 인간-주체를 억제하면서 세계를 제시하고자 했다면 우물은 친근하게 다정하게 우리 자신은 하나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중립적으로 제시한다. 얕으면서도 맑고 투명함이 깊은 우물은 높은 하늘을 가깝고도 경이롭게 내려다 보게 만든다. 강렬한 햇빛의 강도로 눈이 부시거나 신체의 피로감으로 응시하지 못하는 하늘을 우물은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를 표피적인 시각을 넘어, 촉지적인 충만함으로 껴안는다. 우물에 비치는 것과 같이 세계는 환영幻影이고 흔적의 연속적인 관계라는 것을 살며시 제시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의미론적인 고유성의 탐구나 집착을 버리라고 타이른다.  

 

러한 거울과 우물이 담지한 세계의 근거가 작가 김영운의 출발점이다. 그곳은 참과 거짓, 선과 악, 미와 추, 성과 속, 기의와 기표가 구별되지 않는 곳이다. 하늘의 성스러운 것이 우물이라는 물질적 지평으로 추락하여 인간이 규정한 그 반대의 영역과 비율적 관계망을 형성하여 기이하고도 우리에게 포섭되지 않는 지상의 신비함을 발생하는 곳, 그곳이 작가의 모태, 모성적 공간, 생성하는 창의적 공간이다. 이곳에서 김영운은 달의 뒤쪽, 사물의 이면, 모서리의 끝, 돌아서는 산모퉁이를 사유한다. 그것은 물질의 영역이 끝 간 곳의 지점이며 의식이 종료한 지대이며 사물과 사물이 부딪치는 무한한 사이공간 곧 코라khôra의 대지이다. 그곳은 어머니의 자궁이 태아를 성장시키듯이 어떤 것이 존재하고 성장하고 소멸하도록 해주는 그런 비장소의 사이공간이다. 이 비장소의 장소가 김영운의 종착점이다. 우리가 따라가야 할 곳은 그러한 비장소를 가로지르는 물결의 주름을 쫒아가면서 우물에 비친 산유화山有花를 사유하는 작가의 중용적 공간이 해석되는 지점 곧 때로는 모성적 공간으로 때로는 부성적 공간으로 제시되는 그 유동하는 사유의 극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그의 사유는 생성의 이후를 병행적으로 따라가는 부성적 공간을 주목할 수 있다.  

 


 

이후以後의 자유의지  

 

가 김영운이 생성의 공간, 사이의 공간, 코라khôra의 대지에서 의식적으로 놓치지 않는 것이 있다. 그 비장소의 공간에서 살아가야 된다는 것, 곧 우리는 물질적 의식적 한계를 지닌 한 개체로서 그 모성적 공간에서 빠져나와 한줄기 빛을 확보하기 위해 뛰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규정된 것이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본성이라는 것이다. 타자에 비친 흔적을 지워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소박한, 진실된 행복은 아닐지라도 생성의 공간에서 무한정 빗줄기를 맞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 곧 부성적 인식이다. 인간의 숙명적, 노예적 본성을 그는 병행적으로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유의지는 심대하다. 그래서 그는 의식적이다. 관념을 따라 타자를 제압하고자 한다. 그러한 사유의 연장에서 타자가 내포한 그의 다른 얼굴을 그는 찾고자 한다. 그의 추상기계는 탁월하게 타자를 제압한다. 그러므로 그의 코라khôra에 대한 사유공간은 추상적으로, 의식의 극한으로 올라간다. 그에게 슬픈 재현은 없다. 그렇지만 기쁜 추상의 고통을 동반한 채, 산유화를 꿰뚫는 총알 같은 미세한 질감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유언처럼 유지하는 형식과 사이공간의 삼각주가 나와 너를 넘어 우리를 향한 그의 날카로움이 감각을 타고 흐른다. 그렇게 그는 생성 이후의 예리한 감각의 칼날을 의식적으로 탁월하게 지탱하는 것처럼 의식의 끝을 참斬하는 것에도 지혜롭다. 그러므로 그는 의식의 이전以前을 개척한다.  

 

초록 이전以前의 상처  

 

가 김영운이 날카로운 냉정함으로 자유의지를 초록의 의식적 형식을 지키고자 했다면 그 냉정만큼 그 생명의 초록이 충혈 되었다는 것을 그는 잘 체득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타자를 선점하는 방식이 날개 짓하고픈 송어와도 같았다. 냉정함은 열정에 의지하고 형식에는 항상 이미 빈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의 특유의 우물에의 응시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지닌 형식주의자 이지만 달의 뒷면을 사랑하는 것만큼 사물의 상처를 보듬고 잠재적으로는 항상 아나키스트이다. 그의 형식적 자유의지가 항상 이미 지향하는 코라khôra에 다가서기 위해 그는 형식을 탈구축한다. 그러나 그것은 햇빛을 동반하는 그러한 방식은 아니다. 햇빛의 극한은 의식의 극한이지만 그러한 작동방식이 아니라 그는 달빛의 감각으로 감각적, 물질적 극한으로 형식 이전以前의 상처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의 탈시각적 형식의 탐구는 촉지적이고 후각적이다. 그는 형식의 상처에 내재한 후각의 영역을 드러내기위해, 포착하기 위해 의식과 형식을 지우고 또 지운다. 그의 의식적 열정은 상처의 냉정함과 항상 함께 병행한다. 동봉하고자 하는 그와 사물의 상처가 같이 반짝이고 있다.  

 

그대와 나의 동봉  

 

라khôra의 빈 장소는 입체적인 동거, 동봉의 장소이다. 하늘과 대지 그리고 사람이 서로 이기려고 다투지 않는 곳이다. 작가 김영운에게는 이 빈장소가 항상 유령처럼 따라 다닌다. 그러나 그만큼 그는 자유의지가 강대하다. 그 의식적 지평의 광대함으로 그곳에는 타자가 쉽게 끼어들 수 없고 치명적 사랑이 항상 잉태되고 있다. 그의 이 양가적 사유에서 힘들어 한다. 우물에 비친 하늘은 의식적인 시각적 충만함과 촉각적인 무욕無慾의 의지가 그렇게 아름다웠지만 삶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사이공간의 탐색과 그 빈 장소에서 떠오른 형식적인 초록의 의식적 사유, 그는 그 공간을 주유하고 형식을 끊임없이 탈구축한다. 그는 타자를 동봉하고자 한다. 그의 코라khôra속에서 그 동봉을 확인하지 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삶이다. 그가 지향하는 그러한 지복의 장소가 그의 사유의 한복판에서 끊임없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2011. 安 九(예술학박사) 

 


 

 

 

 

서울아트포럼21 “이 작가를 주목한다” 서문중에서 

 

 

한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자연현상과 우주를 대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작은 부분과 요소 하나하나가 이루어 내는 맛 즉, 묘한 구조현상과 공간감에 매료 되게 된다. 

 

김영운(金永雲)작가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는 순수 이상주의자 이다. 작가의 화면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서로 공존한다. 그는 이미지와 느낌을 한 순간의 포착, 작품 속 새로운 이미지로 탄생시키고자 한다. 

플라톤(Platon) 시대를 보면 공간 해석을 통한 조형언어로 우주의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존재 중 여성의 이미지를 투사한 것을 코라(khôra)라 부르고 있는데, 작가는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다른 공간인 코라(khôra)의 세계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여신과도 같이 순수하고도 새로운 이상세계를 화폭에 보여 내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의 화폭에 그려져 움직이는 혹성 이미지 또는 미세한 점들의 묘사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공간구성을 요지하고 그려낸 것 같은데 비의도적인 같은 매한 매혹성이 자리하고 있다. 보통 푸른 바탕 위에 늘리고 찍고, 그어내 나가는 점들로 표현된 그의 구성세계는 물리적으로는 용이하지는 못하지만 반복되는 작업과정에서 만들어내는 그만의 점들을 바라보면 시간에 비례하는 의미가 숨어 있다. 

평자(評者)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그의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보면 몸에 관한 논의에 사용되었던 개념들의 차이와 유사성을 밝히고 여성의 몸에 대한 현대의 페미니즘 논의들이 각각 어떠한 개념과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몸에 대한 논의들이 있다. 여기서 몸 특히 여성의 몸을 비유하는 데 사용되었던 플라톤의 코라(khôra)개념이 물질 개념과는 상이한 이해방식을 제공한다.  

 

즉, 플라톤에 따라 몸을 독자적 힘을 갖는 코라(khôra)공간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hyle)나 데카르트식의 연장적 실체(res extensa) 개념에 따라 몸을 수동적 물질이나 객관적 대상으로 이해할 때와는 다른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작가는 그 만의 화면에 또 다른 원리를 찾아 도출하고자 하는것 같다. 즉, 그의 그림에 여성의 이미지를 투사한 코라(khôra)개념을 화폭에 소환함으로써 지워진 여성의 몸과 힘을 재구성하기도 하고 질료 혹은 연장체의 개념에 의지하여 몸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파악한 후 이를 비판하거나 삭제하려는 경향을 그의 붓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김영운(金永雲)은 푸른색의 단색화법과 새로운 수법의 그림으로 실험정신이 강한 작가이다. 화폭 바탕에 푸른 하늘과 같은 비물질성을 회화화 하였으며, 그가 찍어낸 점들을 통해 금박(金箔), 불, 물, 공기 등의 그리스 철학적 원소들이 담겨 있다. 

 

요즘 극사실주의(hyperrealism)가 유행하고 있다. 김영운(金永雲)작가는 유행에 따르지 않는다. 꼼꼼이 파고드는 작업이 아니라 생각을 요하는 철학적이고 사유하는 작업들인 것이다. 

작가는 여러 재료를 다양하게 활용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흙과 안료를 혼합하여 그림이 평면에 머물지 않고 입체적인 느낌을 강하게 표출시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한 화면 속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 숨결은 그만의 공감감과 밀도감 그리고 긴장감을 아우러 화면 속 이미지들로 부터 묘한 경계를 부르고 있는 것 이다. 

 

安載榮 (藝術哲學博士. 光州敎大敎授)